레이엔데커 형제는 미국으로 돌아가 일리노이 주 하이드 파크의 아파트에서 살기 시작했고, 작업실을 마련하였다. 그 해 5월 20일, 조는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표지 그림을 첫 의뢰로 받았고, 그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잡지와의 작업을 시작했다.
출판 산업의 중심지였던 뉴욕 시로 이사하였다. 10년 간, 형제는 수익을 얻기 쉬운 장기간의 작업 관계를 의류 생산 업체와 맺었다. 마지막에 레이엔데커의 가장 중요한 의뢰가 된 것은 애로우 제품 셔츠 칼라를 홍보하기 위한 삽화를 그리기 위해 고용된 것이었다. 레이엔데커의 애로우 칼라 맨은 그가 그린 쿠펜하이머 수트와 인터워븐 삭스의 삽화와 함께 20세기 초 10년동안 유행을 따르는 미국 남성을 상징했다.
레이엔데커는 찰스 비치와 함께 뉴욕 뉴로셸의 큰 저택과 예술 작업실로 이주하였고, 조셉 크리스천은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동안 그는 많은 잡지 표지와 남성 패션 광고 의뢰뿐만 아니라 미국 육군과 전쟁 물자를 위한 신병 모집 포스터도 작업하였다.
레이엔데커 경력의 정점을 찍었던 때로,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일부는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레이엔데커는 미국의 걸출한 상업 예술가 중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인기는 상업적인 분야를 넘어서 레이엔데커의 사생활까지 확대되었고, 그와 찰스 비치는 전 분야의 중요 인물이 모이는 큰 규모의 사교 행사들을 주최하였다.
레이엔데커의 경력은 기울기 시작했다.어려워지기 시작한 칼라 산업을 중단하고 주력 상품을 셔츠와 넥타이로 바꾸면서 레이엔데커의 삽화의 광고 사용을 중단했다. 1936년, 그때까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서 레이엔데커의 표지 작업을 편집했던 조지 호라스 로리머가 은퇴하면서, 웨슬리 위난스 스타우트(1937년~1942)와 벤 힙스(1942년~1962년)가 새롭게 편집을 맡게 되었고, 둘 모두 레이엔데커에게 좀처럼 표지 그림을 의뢰하지 않았다.
레이엔데커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마지막 표지는 1943년 1월 2일의 새해 아기(New Year Baby)였고, 그리하여 이 예술가의 주요한 수입원이자 기념할만한 일련의 의뢰도 끝을 맺었다. 새로운 의뢰도 계속 있었지만 들어오는 속도는 느렸다. 그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미국 전쟁부의 포스터로, 이 포스터에 군대 지휘관이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국가의 분투를 지원하기 위해 채권 구입을 장려하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1951년 7월 25일 뉴로셸의 사유지에서 급성 관상동맥혈전증으로 사망하였다.
▲노먼 록웰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표지